충분히 현실 같은 세계의 요리사

페인터 람한의 작업실

게임과 미디어를 통해 만들어지는 가상의 감각적 체험을 작품과 연결하는 디지털 페인터 람한의 작업실. 가상의 감각과 실제의 감각을 대등하게 다루고 싶다는 람한 작가는 실제로 먹으면 배를 부르게 할 것 같이 미각을 자극하는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충분히 현실 같은 세계의 요리사다. 이 요리사의 작업실은 어떤 모습일까? 이모먼트 팝업 전시를 앞두고 작업실을 찾았다.

지난 번 인터뷰 때는 망원동에서 동생 분과 함께 사용하는 작업실에서 만났었지요. 작업실을 인천으로 옮기셨네요.
공사가 얼마 전에 끝나서 다소 어수선합니다. 집에 걸어서도 갈 수 있는 거리이고, 동네도 한적해서 매우 만족하고 있어요.
람한 작가의 반려묘 ‘오무’.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속 캐릭터의 이름을 따왔다.

람한 작가님을 소개할 때 ‘MZ 세대가 열광하는 작가’라는 수식어가 항상 따라와요. 정확하게는 ‘Z세대’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후반에 출생한 세대로서 IT 기술을 많이 접하고 자유롭게 사용하는 세대)의 공감을 받는 작품 세계에 대해, 작가 본인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요.
밀레니얼 세대인 제가 Z세대와 가까운 세대의 작가이기 때문에, 이들에게 하나의 사례가 되는 것 같아요. 또 저는 게임이나 여행, 아니면 SNS를 통해서 일상의 이미지들을 제 나름의 세계관 안에서 시각적으로 엮어내는 작업을 하고 있어요. 이러한 작업 내용이 Z세대에게 친근하고, 공감을 사는 것 같아요. 일반인 혹은 예비 창작자분들이 제 작업을 봤을 때 약간 첫 맛이 달콤하지 않을까? 맛을 받아들이기 좀더 편한 질감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한국 미술계에서 개인작가로서, 인스타그램 팔로워 수도(약 8.7만) 압도적으로 높아요.
인스타그램에서 제공하는 인사이트를 살펴보면 ‘MZ세대 여성’ (18~24세 34%, 25~34세 50%, 여성 70%)이 저를 팔로우하는 주된 계층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일단 제 작업이 동시대의 이미지이기는 하지만, 그 세대를 타겟팅한 것은 아니에요. 저는 저의 세대를 살아왔을 뿐이지만, 다른 세대가 경험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작업으로 풀어가고 있어요. 제 세대를 아우르는 작업이 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작업실 한 켠에 애니메이션, 게임과 관련된 소품들이 놓여있다.

창작은 그 세대가 향유한 문화의 영향을 받잖아요. 작가님에게 영향을 준 요소는 무엇인가요?
단번에 얘기할 수 있는 건 게임이에요. 초등학생때 좋아했던 <일랜시아> 같은 게임들요. 물론 저는 라이트 유저였지만요. 게임을 고수가 될 때까지 하는 스타일은 아니고, 세계관을 경험해 보는 느낌으로 해요. 마치 영화를 관람하거나 관광객이 관광지를 둘러보듯이 말이죠.

최근에 인상깊었던 게임은 무엇인가요?
 <마인크래프트>였어요. 이 게임의 큰 특징은 친숙하고 간단한 비주얼에 비해 상당히 현실적인 긴장감을 조성한다는데에 있어요. 절벽에서 떨어져 죽으면 가진 모든것을 잃게 되고, 내 집의 좌표를 기억하지 않으면 모험을 마치고 집에 돌아갈 수도 없어요.
거실과 같은 역할을 하는 소파가 놓인 휴식 공간

영화 보듯이 게임을 대하는 것 같아요.
그렇죠. 하지만 영화는 ‘어떻게 주인공이 무사히 집에 돌아갈까?’ 라는 궁금함을 가지고, 소원을 품고 보게 되잖아요. 그런데 게임은 제가 주인공이 되어 집에 돌아가야 하는 상황인 거예요. 그래서 저는 게임에서 주는 경험이나 기억에 애착을 많이 느끼고, 실제의 감각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작가님의 작품이 무척 감각적이고, 마치 실재하는 오브제를 만지는 것 같은 촉각적인 느낌이   강한 것도 비슷한 맥락일까요?
맞아요. 제가 작품에서 표현하는 촉감은 ‘저건 뭔가 탱글탱글하고 반짝반짝하고. 촉촉할 것 같고…’ 등의 상상을 불러일으키지만, 실제로는 그냥 그림일 뿐이잖아요. 게임은 이런 실제와 같은 감각을 상상하는 경험을 반복해요. 최근의 <젤다-야생의 숨결> 같은 서바이벌 게임에서는 실제로 음식을 요리해서 캐릭터가 먹어야 아이템의 효과가 발생해요. 저는 요리를 하는 과정을 거쳐서 음식이라는 특정한 시각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이 좋았어요. 제가 만든 아이템의 생김새를 모니터로 보는 것, 캐릭터가 아이템을 먹는 것 자체가 재미와 흥미로 연결되더라고요.
주방, 작품이 놓인 책상

이번 전시와 무척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내용이네요.
게임을 통해서 익힌 요리라는 감각은 실제 요리와는 무척 유사하지만 다른 제3의 감각이지요. 제 머릿속에서 떠올리는 유사 감각들을 무척 좋아하고 이를 다시 작업으로 연결하는 것이 재밌어요. 저는 원래 음식에서 영감을 많이 받고, 음식에서 시각적인 규칙성도 발견하곤 해요. 이를 드로잉으로 여러 장 나열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이번 전시가 좋은 기회가 된 것 같아요. 리우션과 함께 하는 전시는 보는 것 자체로 재밌고 흥미롭고, 감각적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이 먹는 것, 음식이었고요. 사실 리우션이 저에게 맨 처음 연락을 주신 건도 음식에 관한 전시 기획이었잖아요. 그때는 참여를 못했지만요.

맞아요. 그러고 보니 우연이 겹치네요. 음식은 이러한 유사감각을 실험하기에 매우 적당한 소재인 것 같아요.
제가 생각하는 음식은 실제 음식이라기 보다 음식 사진, 인스타그램이나 기타 SNS에 올리는 음식 사진, 음식 이미지이죠. 말하자면 현대인들이 사진 찍기에 적당한,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기에 충분한 장식적인 음식을 좋아하고, 음식을 맛뿐 아니라 시각적으로도 소비하고 싶어한다는 사실이 흥미로웠어요. 음식에 있어서 유사감각은, 어쩌면 실제로 느낄 수 없다는 것 자체가 굉장한 자유를 주는 것 같아요. 저는 실제로 게임의 음식을 먹을 수 없잖아요. 이 말인 즉, 제 마음대로 상상해도 된다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유사 감각이라는 단어는 가상과 현실이 우리가 인식하는 것 보다 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현실과 구분하기가 이미 불가능한 다양한 유사 현실을 상상하게 하네요.
저는 요즘 제너러티브 아트(Generative Art: 자율적인 시스템 사용으로 창작되어진 부분 또는 전체적인 예술)를 주의 깊게 보고 있어요. 음식 사진은 일종의 로직이 있고, AI를 통해서 흥미로운 이미지들을 도출하기에 적당해요. AI가 만든 이미지를 보면 제가 그린 것보다 나은 부분도 있고, AI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오히려 역으로 파악해보기도 해요. AI가 만든 이미지들이 어떻게 확장될지 무척 궁금한 부분이에요.
또 저는 마인크래프트나 로블록스 같은, 3D 블록으로 만들어 진듯한 게임들을 보면서 충분히 현실 같거든요? 정말 실제 같은 그래픽으로 이루어진 대상이 아니라, 적은 픽셀이나 복셀로 이루어진 대상을 보고도 실제처럼 느끼게 되는 감각이 근미래적인 인지 감각이 아닐까라고 생각해요.

이에 따라 작가님의 작업도 다양한 장르에 도전하게 되겠군요.
일단은 제가 기존에 하던 페인팅의 영역에서 접근하고 있어요. 3D 아트와 AI와 협업하는 제너러티브 아트를 지속적으로 공부하고 싶고, 나아가서 VR 작업도 꾸준히 도전하고 싶어요. 지난 번 전시의 VR 작업에선 ‘친구 집에 놀러갔는데 친구는 오지 않고 낯선 동물이 와서 내 무릎 위에 앉는다’는 내용의 짧은 시퀀스를 기획했는데요. 친구집에 가서 느낀 촉감, 공간이 주는 느낌을 상상해서 만든 각각의 장면들이 모두 저에게는 페인팅 작업처럼 느껴졌어요.
LIUSHEN
LIUSHEN
람한
회화
팝/서브컬처에 기반한 환상적인 화면을 연출한 디지털 페인팅으로 알려졌습니다. 태블릿과 포토샵을 사용한 디지털 이미지들은 어지러울 만큼 탐미적이면서 동시에 그로테스크합니다. 현실과 상상이 뒤섞인 몽환적인 작가의 작품 세계는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를 통해 기억을 기록하고 공유하는 세대의 디지털 감수성을 자극하면서, 이들의 열렬한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2022 개인전, 이세계 레시피, 이모먼트 by 리우션, 아트앤초이스, 서울
2022 개인전, Spawning Scenery, 휘슬, 서울
2021 단체전, SF2021: 판타지 오딧세이, 북서울 미술관, 서울
2020 단체전, 부산비엔날레, 부산
2019 단체전, Top Wizards, Richard Heller gallery, 캘리포니아, 미국
2019 단체전, Fantasia, Steve Turner Gallery, LA, 미국
2018 단체전, 유령팔,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2017 개인전, Nightcap, 유어마나, 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