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한 괴짜가 사는 곳

조각가이자 페인터 우한나의 작업실

성북로 길모퉁이에 있는 작은 빌딩 지하에서 컬러풀한 패브릭 조각들이 서사를 만든다. 정리된 것을 흐트러뜨리면서 혼돈 속에서 괴짜가 탄생한다. 장기(organ) 백은 그렇게 만들어졌고 어디든 내 옆에 딱 붙어서 동행하는 작품이 되었다.
최근에 작업실을 정비(?)하셨다고 들었어요.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린 모두 일할 때나 무언가를 만들 때 정리된 상태를 무질서하게 바꾸면서 하죠. 그런 점에서 정리란 오히려 흐트러뜨리기 위한 전 단계 같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정리된 상태가 목적이 아니라 혼돈을 위한 준비 단계 같은 거에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미술을 했는데 단 한 번도 색연필을 색깔 별로 구분해서 꼽아 둔다거나 물감을 찾기 좋게 정리해 본 적이 없었어요. 이번에 작업실을 정비한 것도 흐트러뜨릴 수 있는 상태로 환원을 시켰을 뿐이에요. 패브릭을 정리하다보니 제가 생각보다 다양한 천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어요.
 
작업실 동료가 내가 좋아할 것 같다며 선물해 준 티셔츠. 아기 거북이 살겠다고 바다로 들어가고 있다. 나는 블루 컬러를 좋아한다.
이 작업실의 매력이 있다면?

2018년부터 이 곳을 작업실로 쓰고 있어요. 동료 아티스트와 공유하고 있습니다. 2018년 가을에 오프닝 파티를 했는데 우리 둘 다 작가로서 왕성하게 활동을 시작할 때라 약 80명의 지인들이 작업실을 찾아주었어요. 토마토 수프를 끓여 먹고 와인을 마시면서 밤새 음악을 듣고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지하에 있다 보니 마치 바나 라운지 같은 느낌이 들어서 더 편하게 즐겼던 것 같아요. 그 이후로 3-4일 동안 스튜디오를 오픈했는데 정말 재미있는 시간이었어요.
저는 작업실을 제 취향에 맞는 음악으로 채워지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었어요. 지하라는 점이 그런 면에서 좋습니다. 이웃을 신경 쓸 필요가 없고 방해 받지 않는 독립된 공간이죠. 어떤 볼륨으로 음악을 틀어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아요. 공간의 형태도 정사각형이 아니에요. 사다리꼴에 가깝다고 할까요? 중간에 기둥이 여러 개 있고 요철도 많습니다. 그런데 이런 제약이 있다 보니 오히려 공간을 쓰는 아이디어가 생겼어요. 이건 왜 이렇게 생겼지? 하고 계속 생각하게 만들어요. 건축적인 제약 요소(단점)를 장점으로 살리는 게 설치 미술 작업이기도 하구요.

작업실 곳곳에 패브릭이 많습니다. 패브릭은 본인에게 어떤 의미가 있나요?

제 작업실을 차지하고 있는 주된 요소가 패브릭이에요. 저는 어릴 때부터 양말에 일부러 구멍을 내고 그걸 기웠다고 해요. 내 멋대로 가위질하고 바느질하는 걸 좋아하는 아이였죠. 대학교에 입학해 처음으로 제출했던 과제물 재료도 패브릭이었어요. 그렇게 오랫동안 회화 위주의 입시 미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익숙한 매체를 선택한 거죠. 저는 옷을 너무 좋아했고 옷보다는 사실 가방을 더 좋아했고 그런 취향이 작품에 드러나게 되었어요.
그때부터 패브릭 조각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원래는 패션 디자인을 하고 싶었는데 패션 뿐 아니라 공간에도 관심이 있다 보니 무대 미술이나 설치를 하면 좋겠단 생각을 하게 되었고, 회화를 공부하면 그걸 기초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어머니의 조언에 따라 미술을 공부하게 되었어요.
 
패브릭 진열장에 컬러 별로 정리된 패브릭이 작가가 작업에 주로 쓰는 컬러 팔레트를 말해준다.
장기백 시리즈. 핑크와 블랙 컬러가 매칭된 패브릭 작품은 ‘두 개의 갈비뼈’라는 뜻의 ‘two ribs’, 그 아래에 송곳니 조각들이 있다.
이 많은 패브릭을 어떻게 구하나요?

천으로 제품 만드는 일을 하는 분에게 쓰고 남은 천을 얻기도 하고, 또 제가 패브릭 조각으로 작품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분들이 더 이상 안 메는 넥타이 등을 주시기도 해요. 새로 천을 사는 것보다 쓰고 남은 천이나 누군가 열심히 착용했던 넥타이 등을 보는 즐거움도 있어요. 다양한 패브릭의 다채로운 컬러를 보면서 와! 아름답다! 하고 감탄하기도 합니다. 패브릭이나 넥타이를 보면서 그 패턴을 발견하고 머리 속으로 스케치를 합니다. 하나의 패브릭을 펼치면 연이어 다른 넥타이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아, 저는 형태를 잡기 위한 스케치를 하지 않아요. 그리고 컬러풀한 패브릭이 공간에 있으면 자연스럽게 눈길을 끕니다.

마네킹이 이 작업실의 신 스틸러네요.

2019년 개인전 때 선보인 ‘물라쥬 멜랑콜리크’라는 작품이에요. 작품 이름을 개인전 제목으로도 사용했어요. 패브릭 조각들로 만든 조형물로, 멜랑콜리한 요소들이 모여 있습니다. 디자이너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체크 패턴, 빅토르앤롤프의 복고적인 레이스, 장폴고티에의 뷔스티에 등에 영감을 받아 내 맘대로 섞어 만든 드레스에요. 제가 주목한 이 세 명의 디자이너에게는 공통점이 있는데요, 모두가 기성 패션이나 패스트 패션을 거부하고 쿠튀르를 추구했어요.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하지 못한 천재 혹은 괴짜죠. 그래서 왠지 멜랑콜리하고 애잔합니다. 저는 이들을 존경해요.
대표작 물라쥬 멜랑콜리크(왼쪽 마네킹). 세 명의 쿠튀르 디자이너를 찾아보세요. 오른쪽에 있는 헹거 작품은 남미의 토템에 영감을 받아 헹거에 직접 물감으로 그림을 그렸다. 장기 백이 걸려 있다.
애착이 가는 물건이 있다면 얘기해 주세요.

파란색 보스(BOSE) 스피커요. 지금의 남편이 남자 친구일 때 선물해 주었어요. 보시 스피커를 통해 음악이 울려 퍼질 때는 작업실이 콘서트장이나 라운지가 되는 기분이에요. 사실 작업할 때 춤추면서 많이 해요. 아무 춤이나. 전시를 준비할 때는 하루에 14시간 이상을 이 곳에서 보내는데, 음악이 없으면 버티기 힘들어요. 에너지를 끌어내기 위해 좋은 음악을 틀고 볼륨을 최대로 해놓습니다.

최근에 만든 백 시리즈에 대해 이야기해 주세요.

제가 원래 백을 좋아했어요. 특정 브랜드의 '제품'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제 몸 가까이에 무언가 함께 있는 걸 좋아했던 것 같아요. 백 시리즈 시작은 2019년 가을, 우연히 제가 한쪽 신장이 없다는 걸 알게 되면서부터에요. 여러 가지 검사를 했지만 원인을 못 찾았고 나는 앞으로 그냥 외신장인 채로 살아야 한다는 걸 알게 됐죠. 그 이후 장기에 대해 집착적으로 생각을 했어요. 공기가 안 좋은 날은 폐를 하나 더 들고 다니면 어떨까? 이렇게 문제가 생길 때를 대비해 장기를 가방처럼 고안해서 들고 다니는 상상을 해보았어요. 일종의 상실을 위로하는 과정이었던 것 같아요. 
만들면서 장기의 붉은 선홍색, 그리고 저마다 다른 형태가 특별하다는 걸 발견하게 되었어요. 같은 선홍색인데도 사람들은 립스틱일 때는 그걸 예쁘다고 하고 장기를 볼 때는 무섭다고 생각하는데, 왜 그럴까 의문이 생겼어요. 그레서 장기를 아름답고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 백으로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처음에는 실재로 존재하는 장기 백을 만들다가 나중에는 암세포를 다 흡수하는 ‘캔서 서커’, 악몽을 처리해주는 ‘나이트메어 서커’, 자꾸만 잃어 가는 기억을 저장해주는 ‘메모리 파우치’ 등 상상 속의 장기로 백을 만들었습니다. 백 시리즈는 저마다 지닌 상실과 슬픔을 위로해주는 일종의 소망이에요.
 
직장의 일부에서 영감을 받아 상상해서 만든 서큘레이티드 렉텀. 장기 백 대부분은 원형 그대로가 아니라 영감을 받아 형태를 상상하여 만든다.
Abdomen : nomal 복부_정상, 패브릭, 솜, 우레탄, 페인트, 25 x 32 x 70cm, 2000, 서울
Copyright (c) 우한나 Woo Hannnah
‘장기 백’은 어디든 데리고 다닐 수 있는 작품이네요.

그렇죠. 손에 들거나 손목에 묶거나 어깨에 매거나 상반신에 크로스로 걸치는 등 지닌 사람 마음대로 몸에 부착하면 됩니다. 집에 둔다면 작품처럼 벽에 걸거나 어딘 가에 올려두어도 되고, 따로 행거를 만들어서 걸어도 돼요. 최근에 한 개인전에서 관람한 분들이 장기를 모티브로 하는 제 백을 들고 한 시간씩 돌아다니는 일종의 퍼포먼스를 했는데 다들 즐거워하셨어요.

패브릭 외에 회화 작품도 눈에 띄는데 얼마나 자주 그리시나요.

백 시리즈나 설치 외에 회화에도 늘 관심을 두고 있어요. 전시로 보여드리지 않아서 그렇지, 늘 그리고 있습니다. 다만 그리고 나서 뭔가 제 것처럼 나와주질 않아서 아직 보이지를 못했었죠. 지금 찾아가고 있고 차차 보여드리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저는 보통 한 가지만 하지 않고 여러 가지 작업을 동시에 하는 걸 좋아해요. 그걸 루틴으로 하고 있어요. 바느질을 하다가 그림을 그리고 그리다가 우레탄 폼 조각을 만들거나 드로잉을 하기도 해요. ”
Crying, 패널 위에 페인트, 스프레이 페인트, 아크릴 물감, 53.5 x 45.5cm, 2020, 서울
Copyright (c) 우한나 Woo Hannah
Ashley Y. Choi
Lee Ju-yeon
우한나
회화, 패브릭조각, 설치
우한나 작가는 도시인들의 이야기에 대해 몰두해 왔습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조형예술과 예술사, 동대학원을 졸업했으며 입체를 기본으로 영상이나 음악이 함께 가미하는 설치미술을 합니다. 2016년 첫 개인전 <CITY UNITS>를 을지로에 위치한 작가 자신의 작업실에서 열었으며, 2018년 삼육빌딩, 2019년 프로젝트 사루비아 다방, 2020년 송은아트큐브까지 총 4차례의 개인전을 꾸준히 개최하고 있습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조형미술과 예술사, 예술전문사 졸업
 
2021 개인전, Hanna Flashed That, 이모먼트 by 리우션, 아트앤초이스, 서울
2020 개인전, Ma Moitie, 송은 아트큐브, 서울
2019 개인전, Moulage Melancolique,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다방, 서울
2018 개인전, Swinging, 삼육빌딩 1층, 서울
2016 개인전, City Units, 서울 촉촉투명각, 서울
다른 스튜디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