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트윈 픽스의 비무장지대

디지털 페인터 람한과 애니메이션 감독 한지원의 작업실

두 살 때부터 같이 그림을 그리며 놀고 같은 만화를 보고 같은 블로그에 그림을 올리고 같은 중고등학교를 나와 같은 대학과 학과에 들어간 쌍둥이 자매가 함께 쓰는 작업실. 온라인과 디지털의 노스탤지어를 공유한 채 각각 디지털 페인터와 애니메이션 감독으로서의 길을 걷고 있다. 2층 커다란 유리창으로 오래된 플라타나스 나무가 가득 들어오는 망원동 작업실에서.
작업실 문에 “워크룸 야하” QR코드가 있던데…

람한 “야하”는 제 동생 한지원의 닉네임이에요. 일종의 신나는 감탄사에요. 그러니까 여기는 원래 동생이 쓰던 작업실이에요. 저는 주로 디지털로 그림을 그리고 개인 작업이 대부분이라 집에서 해도 되긴 하는데 생활의 흔적이 가득하고 너무 익숙한 곳에서 일하는 게 답답하게 느껴졌어요. 작업실에 대한 로망도 있었구요. 마침 동생이 프로젝트를 끝낸 뒤 공유자를 찾고 있어서 지난 봄부터 나오기 시작했어요.

한지원 연남동에 작은 작업실이 있었는데 새로운 애니메이션 프로젝트를 맡게 되면서 새로 얻은 사무실이에요. 카카오 티비에서 스트리밍 서비스하는 스마트폰용 회당 20분짜리 드라마 <아만자>에 삽입되는 3-4분 분량의 애니메이션을 만들었어요.

 

이 작업실의 좋은 점은요?

한지원 저는 탁 트인 느낌과 채광을 중시하는데 2년 전 이곳에 처음 들어섰을 때 2층 창문에 플라타나스 나무가 꽉 차 있는 느낌이 좋았어요. 값으로 환산될 수 없다고 느꼈어요. 원래 오래된 여행사 사무실이었는데 인테리어 관련 일을 하시는 엄마의 도움을 받아서 천장을 노출시키고 전체적으로 화이트 톤으로 칠하고 커다란 녹색 식물들로 공간을 꾸몄어요.

람한 제일 좋은 건 동생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거에요. 지원이는 저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에요. 우린 아주 어렸을 때부터 모든 것을 함께했어요. 엄마의 영향을 받아서 우리 둘 다 모던하고 깔끔한 공간을 좋아하는데 그런 점에서 작업실이 아주 마음에 들어요! 그 다음으로는 편안한 소파와 큰 테이블도요. 작업도 하지만 사이사이 아주 편안하게 쉴 수 있거든요. 집중과 무장해제, 둘 다 잘되는 곳이에요.
 
람한도 닉네임인가요?

람한 람한은 제 활동명이면서 닉네임이에요. 중학교 때부터 친구들이 저를 “람쥐 람쥐”라고 불렀는데 람쥐의 ‘람’에 제 성인 ‘한’을 붙여서 만들었어요. 2005년 쯤 네이버 블로그에 만화, 일러스트, 그림 등을 올리기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이 닉네임을 사용했어요.

작업실 말고도 두 분이 공유하는 게 많을 것 같아요.

람한 두 살 때부터 같이 그림을 그리면서 놀았어요. ‘119 구조대’ 같은 TV 프로그램을 보면서 사건에 등장하는 다친 사람을 그렸던 것 같아요. 어디에 묶여 있다거나 목발을 짚고 있거나 눈 한쪽이 없는 사람 등등요. 공주를 그려도 피 흘리는 공주나 여전사 이미지로 그렸어요(웃음).

한지원 PC 한 대를 나눠 쓰면서 게임도 같이 하고 같은 네이버 블로그에 그림을 올렸어요. 늘 같이 다니고 같이 놀았죠. 좋아하는 게 같다 보니 나중에는 같은 대학 같은 학과(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애니메이션과)에 입학했어요!  
 
람한, Object_04_F, digital image, print on paper, 20 x 20 x 15 cm, 2019, edition of 5+2AP
Copyright (c) 람한 Ram Han
작가로서 감독으로서 활동하는 데 가장 많은 영향을 준 것

람한 제 작업은 만화책(코믹스)과 애니메이션과 게임 등에 그 뿌리가 있다고 볼 수 있어요. 특히 일본 만화의 아름다우면서도 잔혹한 미학적 요소와 조형감에 끌렸던 것 같아요. 스튜디오 지브리오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등을요. 비디오로 ‘요괴소년’도 보구요. 중학교 때 ‘엘렌시아’라는 8비트 롤플레이게임을 열심히 했는데 최근에 뉴욕에서 활동하는 디자이너 예지가 디제이로서 기획한 할로윈 파티 포스터와 트레이딩 카드를 맡았을 때 바로 ‘엘렌시아’가 모티브가 되었죠.

한지원 저희는 만화를 보면서 성장한 세대에요. 일요일엔 어김없이 TV로 디즈니 만화동산을 보고, 당시 큰 인기를 끌었던 클램프의 ‘카드캡터체리’나 ‘엑스’등을 탐독했어요.

애니메이션을 공부하고 미술계에 발을 들이기까지

람한 애니메이션은 노동집약적이고 반복적인 드로잉을 수행해야 하고 긴 시간 많은 사람과 소통을 해야 해요. 그런 점에서 집중력이 뛰어나고 노력의 결과로 이루어진 성취를 즐기는 지원이가 애니메이션 감독이 된 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반면에 저는 혼자 하는 게 더 좋고 뒷심이 부족한 편이에요. 개성이나 취향도 강하구요. 그래서 애니메이션을 하지 않고 일러스트를 그릴까, 고민했어요. 이때 인스타그램에 낙서 같은 드로잉을 계속 올렸죠.

한지원 지혜의 드로잉은 아주 키치하고 독특했어요. 저는 ‘완성을 시켜라’ ‘일단 3개만 완성시켜보자’고 계속 설득했죠.

람한 동생의 조언대로 완성된 일러스트를 올리자 반응이 왔어요. SM(레드벨벳), 애플, 시피카 등에서 의뢰가 들어왔어요. 저 또한 ‘아, 이거구나’ 하고 느껴지는 게 있었어요. 이전의 드로잉이 자기 만족이나 일기 같은 것이었다면 보는 사람이 완성이라고 느끼는 게 비로소 ‘완성’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저와 비슷한 추억과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공감을 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어요. 그렇게 해서 용기를 냈어요. 북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연락이 와서 “유령팔”이라는 전시 프로젝트에 룸타입 시리즈를 선보이게 됐구요.

한지원 어렸을 때는 지혜를 보면서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 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작가로서의 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저도 아이디어를 얻고 자극을 받아요.
디지털 페인팅, 디지털 드로잉, 어떻게 이해하면 되나요?

람한 저는 기기의 모니터 등을 통해 디지털로 구현된 이미지를 통해서 세계의 물성을 인식해요. 제 그림에 대해 ‘몽환적이다, 센슈얼하다, 판타지다, 텍스쳐가 기름지다’고 느끼는 분들이 많은데 그건 제가 디지털이라는 미디어를 통해 포착한 시각적인 이미지가 그렇기 때문일 거에요. 저는 좋은가 나쁜가가 아니라 강렬한가 그렇지 않은가에 집중해요. 저의 시각과 기억에 디지털이 강렬하게 남겨 놓은 ‘질감’을 표현하는 데 집중하는 거에요.

디지털의 '질감'

람한 예를 들어 픽셀이나 기기의 기술적 진화 등으로 HD 시대가 가고 4K 시대가 오면서 새로운 모니터에 구현된 매끄러운 이미지가 제 시선을 사로잡는 거죠. 반면에 그 이전 시대의 상대적인 저화질 이미지는 저에게 디지털적인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는데요, 앞서 언급한 일렌시아 프로젝트가 그 예라고 할 수 있겠네요.
저는 구체적인 감정이나 장면이 판타지로 표현될 때 보는 이의 상상력을 자극하며 구체적으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고 보고 있어요.

무엇에 영감을 받고 그림을 그리나요?

람한 평소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나 떠오르는 생각 등을 스마트폰 메모나 사진으로 그때 그때 기록해요. 예를 들어 산책할 때 제 눈길을 끄는 것들 - 집 근처 논두렁이나 허허 벌판에 낀 밤안개나 가로등 불빛을 받아 빛나는 둑 옆의 도랑이나 우거진 풀 등을 사진으로 찍어 둬요. 그리고나서 그림을 그릴 때 이것들을 꺼내서 들여다보는 거죠.
람한, Souvenir 03_F (Pull up Pull up), digital image, archival print on paper, 47.5 x 53 cm, 2019, edition of 100+2AP
Copyright (c) 람한 Ram Han
디지털로 그림을 그리는 과정을 말해주세요.

람한 이제 그 기억과 순간을 스케치하는 과정부터가 모두 디지털로 이루어져요. 신티카 액정 태블릿(드로잉 판)을 이용해서 스케치를 하고 채색을 하고 완성을 하는 거죠. 사실 디지털로 스케치에서 완성까지는 즉흥적인 부분이 많아요. 원래 종이 위에 그리는 드로잉은 한번 채색하면 색을 못 바꾸는데 디지털로 하다 보니 undo나 redo 동작으로 시간을 역행하기도 하면서 그려요, 디지털 파일에는 히스토리가 기록되어 있어서 취소도 하고 새로 그려서 다시 시작할 수 있어요. 보다 자유롭다고 느껴지기도 해요.

라이트 패널 방식은 무엇인가요?

람한 그 다음은 출력인데, 제 그림은 디지털의 질감이 잘 표현되어야 하므로 프린트 품질이 매우 중요해요. 사실 디지털 이미지에 가장 가까운 색감을 구현 방식은 뒤에서 불빛이 나오는 라이트 패널이에요. 이 경우 조명용 필름에 아카이벌 프린트를 해요. 아카이벌 프린트란 쉽게 말해 전시용 프린트인데, 잉크 카트리지 수가 10개 이상이라 현재로서는 형광색 등 RGB 색감을 가장 잘 구현할 수 있는 출력 방식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대형 작품은 일반 상업용 네온 간판인 파나플렉스 방식으로 제작해야 돼요.
람한, Roomtype_03, digital image, archival print on paper, 101.6 x 152.4 cm, 2019, edition of 30+2AP
Copyright (c) 람한 Ram Han
특별히 관심을 두는 영역이 있다면요?

람한 제 작품에는 몇 가지 영역이 있어요. 제가 특별히 애착을 가지고 계속 연구하고 싶은 것들을 일정하게 모아 놓은 일종의 아카이브에요. ‘룸타입’이나 ‘수비니어’ 등이 그러한 연작 시리즈에요. 저의 세계관을 유지하면서 확장시켜 나가는 방법이라고 볼 수 있어요.
룸타입 시리즈는 공간에 대한 생각을 판타지로 묘사한 그림인데요, 사람은 누구나 주거지와 안식처에 대한 생각을 하잖아요. 룸타입 시리즈는 호텔 객실의 이미지라고 볼 수 있는데, 내가 편하게 쉴 수 있도록 누군가 고민해서 만든 공간에서 막상 나는 아무 것도 바꾸거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모순을 품고 있어요. 여행에 대한 판타지라고도 볼 수 있겠네요
수비니어 시리즈는 여행지에서 획득하는 기념품에 대한 이야기에요. 부질없는데 왜 갖고 싶은가? 뭐라도 남기고 싶은 마음? 기억이나 추억의 잔해? 기념품에서 느껴지는 약간 어설프고 키치한 조형감이 익숙하고 좋아서 그리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계획

람한 게임에서 직접적으로 영감을 받은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게임에서도 개발자가 구현한 공간을 돌아다니는 일종의 여행이잖아요. 룸타입이나 수비니어에 게임적인 요소를 넣어도 좋을 것 같아요.
 
Ashley Y. Choi
Studio RANG
람한 Ram Han
디지털 페인팅 (람한), 애니메이션 (한지원)
람한 작가는 사이키델릭한 색채와 형태들로 구성한 몽환적인 디지털 페인팅으로 알려졌습니다. 현재와 과거의 팝/서브컬처에서 드러나는 실험적인 판타지를 구현하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작품을 통해 관객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장소나 경험에 대한 기억을 갖게 됩니다.
한지원 감독은 코피루왁 (2010 인디애니페스트 대상 수상), 학교 가는 길 (2013 인디애니페이스트 독립/새벽 관객상 수상) 등으로 알려진 애니메이션 감독입니다. 현재 카카오 TV 웹 드라마 아만자의 애니메이션 파트와 라프텔을 제작하고, 최은영 원작의 <그 여름>을 감독하며 스트리밍용 애니메이션 시리즈 제작으로 영역을 확장하고 있습니다.
람한
2022 개인전, (예정) 이모먼트 by 리우션, 아트앤초이스, 서울
개인전, (예정) 갤러리 휘슬, 서울
2021 (단체전) SF2021: 판타지 오딧세이, 북서울 미술관, 서울
2020 단체전, 부산비엔날레, 부산
2019 Top Wizards, Richard Heller gallery, 캘리포니아, 미국
(단체전) Fantasia, Steve Turner Gallery, LA, 미국
2018 (단체전) 유령팔,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2017 Nightcap, 유어마나, 서울
 
한지원
그 여름 (2021) 연출 (제작 라프텔, 메인프로덕션 레드독 컬쳐하우스)
아만자 (2020) 웹드라마 (카카오 TV 방영), 애니메이션 파트 연출
딸에게 주는 레시피 (2017-2019) 연출 (2018 대한한국콘텐츠대상 콘텐츠진흥원장상)
생각보다 맑은 (2015) 연출 (2016 들꽃영화상 극영화 부문 신인감독상 후보)
학교 가는 길 (2013) 연출 (2013 인디애니페이스트 독립/새벽 관객상 수상)
코피루왁 KopiLuwak (2010) 연출 (2010 인디애니페스트 대상)